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이 서로 다른 두 가지 동맹형식에서 합종의 목적은 위협을 통해 최대한 진의 군대가 함곡관(函谷關)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이다. 연합군이 함곡관을 공격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일종의 제스처에 불과했다. 연횡은 진의 외교전략이다. 목적은 6국을 분화시켜 개별적으로 진과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역사는 합종의 대표자로 소진, 연횡의 대표자로 장의를 거론한다. 이 시대는 대체로 앞에서 말한 제2단계였다. 당시 진의 국력은 크게 강하지 않아서 동방의 제와 패권을 다툴 정도였다. 그러므로 외교적으로 적을 약화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합종연횡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상당히 혼란하고 모순적이다. 종횡가에게 일정한 입장이 없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들에게 종횡론은 출세의 수단이었다. 전국시대 지식인들에게는 민족관념이 없었다. 그들은 자기를 등용하는 나라를 위해서도 일한다는 태도였다. 소진과 장의는 전후로 자신의 입장을 바꿨다. 소진에 대한 고사에는 의문점이 많다. 소진은 장의와 동시대이거나 약간 빨랐다. 그의 시대에 최강국은 제였다. 합종으로 대항할 나라는 진이 아니라 제였다. 악의가 5국 연합군을 이끌고 제를 공격할 때 진도 참가했다. 전목의 관점도 비슷하다.

만약 진이 제와 패권을 다툴 때 외교전략을 사용했다면, 이러한 전략이 존재한 시기는 매우 짧았다. 제가 쇠약해지고, 진이 다시 강성해진 후에는 연횡이 불필요했다. 이 시기 진의 주요전략은 원교근공이었다. 중요한 합종활동은 연횡의 이전이나 동시대가 아니라 그 이후인 제3단계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이 강대국으로 동방을 침략할 때, 산동 여러 나라는 비로소 합종의 필요성을 느꼈다. 진은 조에 이어 위와 한을 노렸다. 당시 위의 공자 신릉군은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합종은 그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두 차례 연합군을 이끌고 진을 격퇴했으므로 합종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 중요성은 고서의 기록보다 크지 않다. 연횡은 지나친 정책에 불과했고, 합종은 여러 가지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제한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산동 제국끼리는 오랜 원한 때문에 자주 충돌했다. 둘째, 지리적 환경의 차이로 진에 대한 위협의 정도도 달랐다. 셋째, 동맹의 지도력이 부족했다. 명목상으로는 종약장(縱約長)이 있었지만, 각국의 국력이 비슷해 타국의 지휘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넷째, 조직이 느슨하고, 상설기구가 없었다. 회원국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명문상의 규정이 없어서 수시로 맹약을 위반해도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장의의 시대에 진은 주동적으로 외교전략인 연횡을 펼쳤다. 그러나 군사전략과는 배합되지 않아서 경우에 따라 배치되기도 했다. 상앙의 변법 이전 진의 문화수준은 비교적 낮았다. 다른 나라들은 진을 무시했다. 강성해진 후에는 그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걸핏하면 무력으로 국위를 드러냈다. 상앙은 전공을 우선시했다. 전쟁이 없으면 전공도 세울 수 없다. 이는 동서고금의 무력지상주의가 직면한 문제였다. 상앙의 변법에서 범수(范睢)의 모략중심주의까지 91년 동안(BC359~BC268), 진은 위와 32회, 한과 17회, 조와 15회, 초와 13회, 제와 6회, 연과 2회 모두 85회의 전쟁을 일으켰다. 매년 1회씩이었으니, 횟수가 많기도 했지만, 목표까지 분산됐다. 무력과시 이외의 의의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호전성은 국력의 낭비와 불리한 정치적 반응을 초래하기도 했다. 육국이 합종을 결심한 것은 그에 대한 반발이었다. 리델하트의 말처럼 진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평화는 잃었을 수도 있다.

범수가 진소왕을 설득해 원교근공 관념을 채택한 후, 진은 비로소 외교와 군사를 융합한 국가전략을 수립했다. 통일대업에 한 걸음 더 다가간 셈이다. 범수가 제출한 전략관념은 가까운 조, 한, 위보다 먼 제를 공격하자는 양후(穰侯)의 주장과 배치됐다. 그러나 귀족인 양후와 다른 계책을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다행히 그는 새로운 전략구상을 국왕에게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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