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티드 버드. ⓒ엠엔엠인터내셔널
▲페인티드 버드. ⓒ엠엔엠인터내셔널

- '저지 코진스키'의 동명소설 원작

- 인간 내면의 본질을 곱씹게 만드는 수작

 

[SR(에스알)타임스 심우진 기자] 영화 ‘페인티드 버드’(The Painted Bird, 3월 26일 개봉)는 1989년 발표된 ‘저지 코진스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동유럽에서 유태인 소년(페트로 코틀라르)이 겪는 폭력과 광기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의 각본, 연출, 제작을 맡았은 체코 출신의 바츨라프 마르호울 감독은 11년에 가까운 제작 기간 끝에 영화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제 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으며, 아카데미영화제 국제장편극영화상 쇼트리스트에 진출했다. 

(※ 이 리뷰에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 직·간접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인 소년은 부당한 차별과 폭력에 저항할 힘이 없는 약자다. 부모를 대신해 자신을 돌봐 주는 ‘마르타’(니나 슈네비치)에게 조차 위로의 말 대신 “너의 잘못이야”라는 꾸짖음을 들어야만 하는 처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의복과 식사 그리고 잠자리는 어른인 그녀의 보살핌 속에서만 가능하기에 불평조차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소년은 물끄러미 가족의 사진을 바라보며 재회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 소년의 소원을 담은 편지는 고난의 시작을 암시하듯 강물에 떠밀려 점점 멀어져 간다.

소년이 유일한 보호자 마르타의 죽음을 마주한 그 순간부터 홀로 남겨진 그에게 일어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비극이다. 타오르는 집을 무력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서서히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 친 소년이 마주한 냉혹한 현실은 짓지 않은 죄에 대한 형벌의 연속이었다.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전개되는 에피소드 속에서 소년은 폭력과 차별의 부당함을 떠안은 채 점점 고립되어간다.

잔혹한 폭력과 증오를 소년에게 퍼붓는 마을 사람들은 평범한 농민들로 선을 행하라는 ‘신’을 독실하게 받들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 가혹함 앞에 억울함조차 호소할 수 없는 소년의 마음은 차츰 검게 그을려간다. 소년은 결국 실어증이라는 방어기제를 통해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끊어낸다.

악마로 몰려 죽을 운명에 놓인 이 가엾은 유태인 소년을 사들인 주술사 ‘올가’(알라 소콜로바)는 잠시나마 그의 구원자가 되어준다. 이후 소년이 흘러 들어간 ‘밀러’(우도 키에르)의 제분소에서 그가 목도한 것은 남녀 간의 사디즘적 폭력. 어른들이 내는 그 광폭한 불협화음이 결국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소년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또 다시 떠돌게 된 소년을 받아준 새장수 ‘레크’(레흐 디블리크)는 새에 색칠을 해 풀어주고 무리에서 따돌림 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노인. 하지만 그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루드밀라’(지트카 크반카로바)가 ‘색칠된 새’와 같은 운명에 놓이자 절규하고 괴로워한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노인이 보내는 세상을 향한 처절한 시선은 또래들에게 애완동물을 빼앗기고 불태워져 절망했던 소년의 그것과 일치한다. 

레크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인간 선악의 본질과 악의 평범성에 대한 주제의식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소년과 루드밀라에게는 선한 존재지만 새의 입장에서는 죽음을 유희로 삼는 가해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지 위의 사랑과 삶의 이유를 빼앗긴 억울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전란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소년은 마치 색칠된 새처럼 유태인이라는 무색의 낙인이 칠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운 좋게 도덕적 양심을 가진 독일군인 ‘한스’(스텔란 스카스가드)나 ‘신부’(하비 케이틀)처럼 호의적인 인물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약자인 소년에게 위장된 선의를 들이밀며 끔찍한 학대를 행하는 ‘가르보스’(줄리안 샌즈)와 같은 자를 피할 수는 없었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던 신부조차 학대의 방관자가 된 상황에서 이제 소년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구원하기 시작한다. 

ⓒ엠엔엠인터내셔널
ⓒ엠엔엠인터내셔널

학대의 그늘을 피해 만난 여인 ‘라비나’(줄리아 발렌토바 비드나코바)에게서 소년은 또 다시 상처 입는다. 채 성장하지 못한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조롱당한 소년은 이제 더 이상 전처럼 주저앉지만은 않는다. 그는 마치 제분소 주인인 밀러를 그대로 판에 박은 듯한 모양새가 되어 극단의 질투와 광기를 표출한다.

마침내 소년은 소련군인 ‘미트카’(배리 페퍼)를 만나게 되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옳고 그름에 관계없는 복수의 자기방어술을 배운다. 그렇게 ‘피해자’였던 소년은 이제 더 이상 어른들의 일방적인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가해자’가 된다. 보호자인 부모의 부재 속에서 그것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영화 ‘페인티드 버드’는 제 2차 세계대전을 겪는 소년의 이야기라는 점만 놓고 보면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조조 래빗’(2019), 스티븐 스필버스 감독의 ‘태양의 제국’(1987) 그리고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반딧불이의 묘’(1988) 등과 소재에 있어서는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이의 시각으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해온 기존 영화들과는 상당히 궤를 달리한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그저 소년이 겪는 수 많은 고통과 시련의 배경에 불과할 뿐이며, 그 중심에는 항상 인간의 폭력성이 존재한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적나라하고 광기 어린 인간성에 대한 묘사는 정면으로 마주하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다큐멘터리 기록물과 같은 흑백필름 화면이 주는 강렬하고 거친 시각적 질감이다. 여기에 더해 배경음악이나 인물의 대사를 극단으로 절제한 미니멀리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관객은 불필요한 감정의 개입 없이 광기와 폭력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를 목격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씬시티’(2005)가 필름 누아르 장르의 비장함을 강화하고, ‘프랭크 밀러’ 원작의 그래픽노블 속 비현실적 공간의 시각화, 과장된 폭력의 증폭, 자극적이고 도드라진 색감 등 오락적 묘사를 살리기 위한 장치로 흑백영화 방식을 일부 사용한 것과 대비된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차별과 혐오, 공포와 광기, 왜곡된 욕망 등 인간 내면의 근원적인 인간 본성은 인간혐오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생존이라는 궁극적인 목적 앞에 윤리가 파괴되고 선악의 경계가 사라지는 서늘한 광경은 우리에게 더 없이 불편한 감정의 멀미를 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직은 ‘요스카’라는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았던 소년을 지켜보며, 우리 내면의 인간본질을 곱씹게 만들기에 이 영화가 지닌 가치는 비슷하게 양산되는 수 많은 작품들 속에서도 또렷하게 그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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