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30대 교포 청년입니다. 저는 중고등학교와 20대 초반까지 캐나다에서 7~8년 정도 거주했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에만 계속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버지의 일 때문에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생활했고 중학교 세 곳, 고등학교 세 곳 정도로 많은 곳을 옮겨 다녔습니다. 

이렇게 변화가 많은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한 곳에 마음을 붙이고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된 대학 시절에도 학교를 세 곳이나 다녔고, 마지막에 들어간 학교를 비교적 늦은 나이인 서른한 살에 겨우 졸업했습니다. 첫 대학부터 마지막 대학교를 다니면서 전공도 중간에 변경했는데 최종적으로는 컴퓨터 쪽을 공부했고 관련 분야로 서른세 살에 한국에서 첫 취직을 했습니다.

진로 결정과 졸업, 취업이 늦다 보니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만나기에 정서적, 경제적으로도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늦었다는 생각에 후회가 되기도 하고 마음이 힘듭니다. 

여전히 진로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습니다. 미국으로 유학 가서 더 많은 기회를 갖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듭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컴퓨터 쪽이 아닌 제가 하고 싶은 분야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독함과 마음의 상처, 아픔이 저를 계속 우울하게 만듭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삶을 멈추고 어딘가에 안정되고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소속되지 못하고 떠돌이 같은 삶을 살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어딘가에 소속되고 안정을 찾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떠나고 싶은 마음과 상충하고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역마살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어차피 역마살이 있는 김에 또 한 번 유학 가서 좋은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을지 고민입니다. 

10대 시절부터 10여 년 정도 심리상담도 받고 우울증, 사회공포증, 강박증 진단도 받으며 약을 복용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상담받거나 약을 복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머니는 이 정도만 해도 전보다 많이 나아진 거라고 하시지만 저는 아직 먼 것 같습니다. 

이런 제 마음이 독립을 원하는 것인지 의존을 원하는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는 상담 관련 책을 읽으셨다면서 제가 아기였을 때 고모가 매일 찾아와서 몇 시간씩 보낸 것이 어머니의 양육자 역할과 저와의 교감을 방해했다고 하시는데, 저는 잘 와닿지는 않습니다. 해결책도 없고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가 제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주시지 못한다면, 성인으로서 저 스스로 어떻게 심리적으로 독립하고 흔들리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지, 진로나 대인관계 등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주체적으로 잘 할 수 있을지 혼란스럽습니다. 조언 부탁드립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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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을 읽으며 오랜 기간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자주 바뀌는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느라 수고하며 혼란스러움을 느끼셨을 사연자님의 마음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며칠 혹은 몇 주간 잠시 여행을 떠나는 데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고 에너지가 드는데 청소년기와 성인기 초반의 7~8년이라는 중요하고 오랜 시간 동안 이동과 변화가 많으셨다니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을까 싶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에도 정체성이나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단일민족, 단일문화, 단일언어권의 사회에서 다른 언어와 다양한 인종적 구성,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 이주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인종적 소수자로서의 경험, 언어장벽으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 다른 제도와 문화로 인한 곤란 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정체성이나 가치관이 아직 형성되고 있는 시기인 청소년기에 해외로 유학이나 이민 갈 때 느끼는 혼란함은 아마 성인이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러웠던 말과 행동이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언어가 비교적 자유롭지 않은 이주 초반에는 하고 싶은 말과 정서적 표현을 다 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민자로서 사회의 주류가 되기는 어려운 현실을 경험하며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연자님께서 10대 시절부터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을 경험하고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하시게 된 배경에도 성격 특성이나 유전적 부분과 같은 개인적, 심리적, 생물학적 요인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문화적 배경이 함께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사연에 남겨 주신 내용만으로 캐나다와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셨을 때의 세세한 상황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에 사연자님이 경험하신 심리적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캐나다,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 항상 중간에 속한 듯한 느낌, 여기에도 속하고 저기에도 속하지만 또 반대로 어느 한 곳에도 완벽하게 속하거나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 같은 느낌이 항상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중간자’,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사연자님의 정체성 중 중요한 한 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중문화나 다문화 상황 속에서 두 개 이상의 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두 문화 모두에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각 문화의 주변부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캐나다에서는 인종적 소수자인 아시아인으로서, 아시아인 중에서도 중국, 일본에 비해 수적으로 적고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인으로서, 반대로 한국에서는 캐나다인 혹은 교포로서 한국에서만 나고 자란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사람으로서 규정되면서 ‘어딘가 좀 다른 사람’으로서 인식되고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서의 자아정체감을 형성하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결정하며 인생의 선택을 한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셨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주하고 한국과 캐나다 사이를 오가는 상황이 사연자님의 결정이 아닌 부모님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이주 과정에서 부모님이 사연자님의 의견을 충분히 물어보셨는지, 사연자님은 의사결정 과정에 함께 참여하셨는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만약 삶의 모양을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을 본인이 아닌 부모님이 내리고 사연자님은 따라가는 역할만을 하셨다면 ‘자율성’이나 ‘독립성’을 충분히 학습하고 연습해 보기는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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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옮기는 과정은 어떠셨는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연자님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얼마나 인지하고 계셨는지, 그것을 표현하실 수 있었는지, 본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들이 이루어졌는지 말입니다. 이 시기가 아직 청소년기로 비교적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시기임을 감안한다면 성인기의 대학교 결정과 입학, 전공 결정, 타 학교로의 이적, 졸업, 취업과 같은 일련의 과정은 어떠하셨는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본인의 의사에 따라 학교를 옮기고 진로를 바꾸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인이 되며 조금씩 사연자님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시도를 해 보셨다면 긍정적인 변화의 사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앞으로 조금씩 크고 작은 결정들을 스스로 내려보는 연습을 하시기를 추천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학창 시절과 대학 시절에 걸쳐 일관적으로 한 곳에 있지 않고 옮겨 다녔던 사연자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캐나다와 한국을 오가며 방황하며 혼란스러웠던 사연자님의 정체성이 학교라는 장면에서도 다시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이 취업을 하고 새로운 삶의 페이지를 열어가는 현재에도 지속되며 다시 반복 재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나라, 이 학교가 내가 속한 곳이 아닌 것 같은 그 익숙한 느낌이 새로운 직장, 한국에서 생활하는 지금도 다시 올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유학을 통해 더 많은 기회를 갖고 새로운 경험을 해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원하시는 분야가 있고 그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회와 경험, 유학 이후의 삶에 대한 분명한 계획과 청사진이 있다면 유학도 좋은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유학을 원하는 마음 깊숙이 어떤 욕구가 자리하고 있는지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만족스럽지 않은 현재 상황이나 지금의 자리에서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부적절감을 해소하기 위한 또 다른 탈출구로서 막연하게 유학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단순히 현재의 문제나 부적절감을 떨쳐버리기 위한 임시방편으로서의 유학이 된다면 미국에서도 지금 느끼시는 것과 같은 이방인, 온전히 소속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유학 여부를 당장 결정하거나 무리하게 실행에 옮기기보다는 현재의 생활 속에서 먼저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껴 보는 경험을 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재의 직장과 한국이라는 생활반경 속에서 좋은 동료, 친구 등을 만나고 유대관계를 쌓는 경험을 통해 소속감이 어떤 것인지, 있는 그대로 나를 보여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아는 것이 어쩌면 지금 사연자님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전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이곳에서 소속되고 행복해지는 경험을 하면서 충분히 시간을 갖고 유학을 진지하게 숙고하는 과정을 가져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 후에도 여전히 유학이 의미 있고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때 도전해 보셔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관계를 쌓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직장 동료분들과 근무 후 저녁 식사나 술자리를 가지면서 조금씩 가까워질 수도 있고, 다양한 문화권에서의 삶을 경험해 본 다른 교포들이나 한국에 거주 중인 외국인들과의 모임에 참여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연자님과 비슷한 경험을 한 분들과 이야기 나누고 시간을 함께 보내며 공감과 이해받는 경험을 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다문화, 이주 관련 상담 경력이 있는 상담사분께 도움을 받아 보시는 것도 권유드립니다. 한국에서든, 캐나다에서든, 미국에서든 물리적인 장소나 환경과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표현하고 사랑하며 사랑받는, 자기 삶의 주인공인 사연자님이 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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