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세규 국회의원의 사과

장군 출신으로 야당의 국회의원이었던 이세규(육사 7기 특기) 의원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까지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나를 향해서도 방첩부대 특공대장 시절에 있었던 1965년 동아방송 조동화 사건과 연계해 1971년까지 6년간을 국회에서 질의했다. 그러다 나와 무관하다는 것을, 취급했던 검사로부터 확인하고 남자답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내게 정중히 사과하였다.

1991년 5월 28일, 육사 7기 동기생 회원들과 함께 계룡대 육군본부를 방문했을 때 참모총장인 나를 별도로 찾아와 두 번째 사과를 했다.

“미안하게 됐소. 이 총장한텐 진심으로 미안하오. 다시 한 번 또 사과합니다.”

나는 답변했다. “이 의원님 덕분에 유명해져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지금껏 내게 사과를 한 사람은 이세규(예비역 장군) 의원과 양순직 의원뿐이다. 양순직 의원도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군단장 출신의 중장 양봉직 장군이 나의 동생이오, 나는 이진삼 장군에 대해 양봉직 장군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소. 내가 왜 그랬나 몰라. 정치적으로 고통 받고 있던 시절이었고, 언론에서 떠들고 야당 영수를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어요. 미안해요.”

두 번에 걸쳐 식사를 함께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훌륭한 두 분의 인격을 존경하고 있다.

 

김영삼의 사과와 유혹

1995년 8월 15일, 사면(?)과 함께 미국에서의 치료를 마친 나는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사면이 됐다고는 하나 억울한 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려운 여건과 환경 속에서도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적극적인 사고와 강력한 실천, 선견적 미래지향적인 사고, 건전한 추리와 상상력이 성공의 디딤돌임을 명심하며 살았다. 역경과 시련이 닥칠지라도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하여 극복하고, 해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실천 의지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했다.

이제 나는 공직을 끝내고 제2 인생으로 접어들었다. 한승수 비서실장을 통하여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민주주의를 내세운 김영삼 대통령은 행정권의 수반으로 직접 지구당위원장 임명장 수여 등 공천까지 손에 쥐고 입법부(국회)를 장악하고 사법권까지 장악한 건국 이래 최고의 독재자였다. 나는 두 번 김 대통령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세 번째 한승수 비서실장을 통해 연락이 왔다. 그는 내게 일단 대통령을 만나 볼 것을 요청해왔다.

1995년 9월 13일, YS를 독대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1993년의 악몽 같았던 일을 꺼냈다. YS는 “몰랐다, 내가 사과하겠다.”로 나를 위로했으나 내 응어리는 풀어지지 않았다. YS는 예상대로 1996년 4월에 치러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는 JP가 총재로 있는 자민련의 붐이 일어난 때로 그곳에 나를 출마시키면 당선될 거란 정보를 입수, JP를 떨어뜨려 정치의 맥을 끊기 위해 신한국당 지구당위원장을 맡아 출마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점심으로 칼국수가 나왔다. 나는 반도 먹지 못했다. YS는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다. 내 마음이 어떤지 아랑곳하지 않고 칼국수를 깨끗이 비운 YS의 식성이 놀라웠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능력도 없지만 정치할 생각도 없다”며 잘라 말했다. 그러자 YS는 내 손을 잡으며 “무엇인들 못 하겠소, 부여 발전을 위한 각종 현안 사업을 다 해주겠소.” 부여를 중심으로 공주, 논산, 서천과 통하는 지역의 도로망 확장은 물론 2년제 국립 전문대학 설립, 백제권 개발 등을 약속했다. 금년 내로 3천억 원의 사업 지원을 약속하며 다시 한 번 입당할 것을 요구하기에 “생각해 보겠다, 시간을 달라” 하고 청와대를 나왔다.

다음 날 아침 10시,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YS는 “어제 고마왔고 내가 약속했던 내용은 꼭 지키겠소. 그리고 이 장군과 약속한 대학교는 2년제 전문대학이 아니라 4년제 대학으로 하겠소. 부여에 내려갈 준비 하시오.”라는 말을 했다.

일주일 후인 9월 20일 10시, 부여지구당 조직책 임명장 수여식 참석 출두 요청을 받았다. 대학유치추진위원회 부여군민발기인대회를 열었다. 11월 8일, 가칭 국립문화대학교(4년)로 정하고 문화체육부 관할 학교로 정부 결정이 하달되었다. 부여가 백제의 고도(古都)이기 때문이다. 문화체육부가 각 부처로 업무 협조를 했으나 12월이 지나도록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이었다. 1995년 내로 건립 결정을 하겠다던 YS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있었다.

12월 27일, 나는 위원장직 사퇴를 결심하고 가족과 함께 제주도를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상부 지시를 받고 달려온 공항 200호실 안기부 이길용 실장이 인사 겸 동선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안기부 제주분실장과 제주지방경찰청장이 사복차림으로 나와 있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나의 위원장 사퇴 기자회견을 우려해서였다. 내가 묵고 있는 서귀포군인호텔 객실에 안기부 요원이 투숙해 있었다. 상부 지시를 받고 나의 동정을 살피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한승수 비서실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대통령이 약속대로 대학 설립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총리에게 하달했고, 국무총리를 비롯해 문화체육부, 내무부, 건설부,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추진 지연에 대해 심한 질책을 했다.”며 서울로 올라와 달라는 부탁의 내용이었다.

1996년 1월 1일 시무식이 끝나자, 문화체육부를 비롯한 각 부처의 상호 의견 조율이 이뤄지고 2월에 국무총리실 주관으로 8개 해당 부처 차관회의 검토를 거쳐 3월 11일에는 해당부처 장관의 결재가 났다. 3월 13일, 비로소 설치령 제정(안) 입법 예고가 되었으며, 대학유치추진위원회 부여군민 보고대회를 시작으로 4월 9일에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6월 20일, 문화체육부는 교육개발원에 6천만 원을 지불하고 설계용역을 의뢰, 9월 7일에는 총 예산 440억 원 중 97년의 예산인 20억 원을 설계 및 부지 정리비로 확보했다. 10월, 부여군 내 유치 요구 지역의 타당성을 검토하여 학교 위치를 결정했으며 11월 20일, 문화체육부가 학교 부지를 답사했다. 예상외로 대학교 설립계획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97년 1월 16일에 부여 청소년수련원 대강당에서 한국전통문화학교 부여 건립 확정 기념 축제를 갖고, 4월에는 모집인원과 6개 과를 결정했다. 4월 24일, YS는 내게 국가정책 평가위원 임명을 하고, 1997년 9월에는 2차년도 예산 250억 원을 확보했다.

1998년 11월 19일,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건립 기공식을 하고, 같은 달 22일에 경과보고 및 추진위원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2000년 3월 2일, 마침내 한국전통문화학교가 개교했다. 인구 8만의 부여군에 2년제 단과대학이 아닌 4년제 대학이 설립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고향에 설립된 국립대학교는 공약 없이 해낸 부여군민의 승리다. 2011년 국립종합대학교로 승격된 바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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