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계척마을 표지석,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계척마을 표지석,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기록적인 장마와 연이은 태풍으로 지리산 밤재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유실되어 오르지 못한 채, 구례를 향한 비탈길을 자전거 안장에 걸터앉아 시원하게 10분쯤 달렸다. 여원재 고개에서 못 만난 비탈길에 대한 보상 같아 위로가 조금은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시배지인 계척마을에 들어섰는데, 이 마을은 오씨와 박씨가 임진왜란을 피하여 정착한 마을이다. 

 

백의종군로 발자취 석벽,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백의종군로 발자취 석벽,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화장실을 이용하려고 조금 더 올라갔다.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 발자취가 돌벽으로 만들어져 오른쪽으로 나열돼 있다. 앗! 돌벽으로 만든 백의종군로 지도가 이순신 장군의 행적에 따라 날짜별로 표시되어 있다. 날짜별로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살펴보니, 권율 장군을 만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화장실 이용으로 체중감량에 성공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구례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손인필비각의 구국정과 출정 조형물,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손인필비각의 구국정과 출정 조형물,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구례의 손일필비각에 도착했다. 왼쪽으로는 구국정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이순신 장군이 수군재건을 위해 9명의 군관과 6명의 병사와 함께 출정하는 모습이 부각으로 만들어져 있다. 

 

수군재건로 기록과 부각,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수군재건로 기록과 부각,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안쪽으로 들어오니, 백의종군로에 이어 44일간의 수군재건로에 대한 기록이 파노라마식으로 나열되어 있고, 부각으로 된 장군의 위용이 드러나고 있다.

 

손인필 안내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손인필 안내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출입구 쪽에 손인필비각에 대한 안내판이 있는데, 지금껏 본 안내판 중에 제일 규모감이 있게 설치되어 있다. 여기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구례를 3번 방문했다. 첫 번째는 백의종군 신분으로 권율 장군을 만나기 위해 합천을 향해 가다가 권율 장군이 순천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운봉에서 유턴하여 방문했고, 두 번째는 순천에 있던 권율 장군이 이순신 장군과 만나기 전에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러 완산(전주) 방향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다시 유턴하여 구례에 십여 일 머물렀고, 세 번째는 8월 3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면서 수군재건을 위해 방문했는데, 현재 손인필비각에 있는 설치물과 조형물은 3번째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것들이다.

구례구역을 향해 출발했다. 역에 도착하면 해 질 녘이 되는 시간이라 스마트폰으로 숙소를 찾았는데, 근처에는 숙소가 없고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일을 위해 할 수 없이 그곳에 예약하여 1박을 해야 했다. 왕복 12km를 헛발질해야 한다니…. ㅠㅠ

다음 날 이른 아침. 백의종군 길을 만나기 위해 구례구역까지 6km 정도를 의미 없이 페달을 밟았다. 아침의 쌀쌀한 기운에 몸이 시리다. 바람막이도 덧입을 겸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는 찐 계란 2알과 온장고에 있는 두유는 찰떡 궁합이다. 잠시 최초의 것들을 떠올려 봤다. 최초의 산수유시배지인 계척마을, 최초의 백의종군 날짜를 새겨넣은 돌 벽화, 최초의 거북선 그리고 느닷없이 최초의 간이식 수술에 성공한 장기려 박사가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인생의 롤모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업인 유일한 박사, 의료인 장기려 박사 세 분이다. 그중 장기려 박사는 이순신 장군과 오버 랩이 되는 부분이 많다.

<잠깐만>
빈 속에는 찐 계란을 몇 개까지 먹을 수 있을까?
답은 1개.
.

.

1개 먹고 나면 더 이상 빈 속이 아니니까….
~유머를 다큐로 받지 마세요. ^.~

 

이순신 장군 인사 기록 관리,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이순신 장군 인사 기록 관리,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먼저 이순신 장군 일화다. 한성의 훈련원 봉사(인사기록 담당) 시절에 상관인 ‘서익’으로부터 부당한 인사청탁이 들어왔을 때였다. 이걸 들어주면 요즘 말로 ‘라인’을 타고 승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단호히 거절했다.

 在下者越遷則應遷者不遷是非公也 且法不可改也
(재하자월천즉응천자불천시비공야 차법불가개야)
아래 있는 사람을 까닭 없이 끌어올리면, 승진되어야 할 사람이 승진을 못 하게 되니 이것은 공정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이충무공행록)

 

성자가 된 옥탑방 의사 장기려 박사
성자가 된 옥탑방 의사 장기려 박사

장기려 박사의 일화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 진행되었던 세계 최대 규모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었던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6.25)으로 인해 1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 중에는 장기려 박사도 포함된다. 장기려 박사는 북한에서 3남 3녀를 두었는데, 한국전쟁 중 차남만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북한 최초의 의학 박사이고, 국내 최초로 간이식 수술에 성공한 의사다. 

성공한 의사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지만 ‘복음병원’이라는 무료 진료소를 차린 것은 물론,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자신의 월급까지 털어서 치료를 해주었다. 어떤 날은 병원비가 없어서 퇴원을 못 하고 있는 농부환자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차비까지 쥐여주며 “뒷문을 열어 줄 테니 도망쳐 나가시오!”하고 강제퇴원?을 시켰고,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연락이 왔다. “박사님. 조건이나 순서와 관계없이 특별히 박사님 먼저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드릴 테니 준비하고 계십시오.” 이 전화에 장기려 박사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다. 
“나보다 먼저 갈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간다면, 그 사람은 나 때문에 가족 상봉을 못 하게 될 터이니, 나는 내 순서가 되면 가겠소.” 이러기를 두 번이나 제안받았고, 두 번이나 거절했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서울 백병원에서 성산(聖山)처럼 눈을 감았다. 장기려 박사가 남긴 재산은 부산 고신의료원 옥상에 있는 옥탑방 한 채가 전부였다. 부자로 죽기 위해 모아놓은 재산 하나 없이….
(장기려 박사 기념관은 부산 동구 초량에 있다.)

모두가 공정한 처사를 원하지만, 자신만은 예외이길 바라고 사는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과 장기려 박사는, 엄정한 잣대를 자신과 타인에게 공정하게 적용한 솔선수범의 본보기다. 믿고 따를만한 두 어른이다.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지만,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다.”

저작권자 © 바끄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