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사가 제공한 식사를 더 자주 받은 의사일수록 해당 회사 약을 더 많이 처방한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AI 생성이미지][헬스코리아뉴스 / 임도이] 제약회사들이 의사들에게 제공하는 선물과 금전적 지원이 부적절한 처방과 처방 건수를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의료비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의사들은 식사 한 끼나 작은 선물이 자신의 판단을 바꾸겠느냐고 생각하지만, 실제 처방 기록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보건의료 분야의 국제 근거평가 단체 코크란(Cochrane)은 9일 제약사의 정보 제공·판촉 활동과 의료인의 처방 실태를 분석한 이런 내용의 체계적 문헌고찰 결과를 '코크란 체계적 문헌고찰 데이터베이스(Cochrane Database of Systematic Reviews)'에 공개했다. 호주 시드니대학교(University of Sydney) 바버라 민츠(Barbara Mintzes) 박사 연구팀은 2025년 1월까지 검색한 문헌에서 제약 회사와의 상호 작용과 처방 행태 간의 관계를 조사한 93개의 연구를 분석했다. 이 중 82건은 미국에서, 나머지 11건은 영국 및 기타 유럽 국가를 대상으로 실시됐다.
연구진은 제약사가 제공하는 식사와 선물, 자문료 등의 금전적 지원을 비롯해 영업사원의 방문, 광고, 교육, 무료 의약품 견본 등이 처방에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살폈다. 환자에게 적절한 약을 처방했는지, 처방 건수와 비용은 얼마나 달라졌는지가 주요 평가 대상이었다.
그 결과 처방 적정성을 분석한 연구 10건의 경우, 지원받은 의사들에게서 부적절한 처방이 더 많이 나왔다. 처방 건수를 평가한 연구 39건도 지원받은 의사들이 해당 기업의 약을 더 많이 처방했으며, 비용을 평가한 연구 25건은 이러한 지원이 처방 비용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사를 제공받는 횟수에서도 차이가 드러났다. 제약사가 제공하는 식사를 더 자주 받은 의사일수록 해당 회사 약을 더 많이 처방했다. 대표적인 약물은 고혈압 치료제, 콜레스테롤 저하제, 항우울제, 오피오이드 진통제 등이었다.
반면 제약사와 의료인의 접촉을 제한하거나 관리한 기관에서는 처방이 개선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영업사원의 방문이나 특정 선물을 제한하는 이해상충 정책을 평가한 연구들은 처방 적정성이 높아지고 처방 건수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연구진은 학술 해설매체 더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기고한 글에서 "의사들은 흔히 '샌드위치 하나로 나를 살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분석 결과는 이런 자신감과 달랐다"고 설명했다. 회사가 선물을 줄 때 처방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받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판촉 과정에서 반복해 접한 약이 실제 처방을 결정할 때 먼저 떠오르는 효과도 있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영국 배스대학교(University of Bath) 피오트르 오지에란스키(Piotr Ozieranski) 박사는 제약사와 의료인의 일상적인 관계에 주목했다. 그는 영국 제약 전문매체 매뉴팩처링 케미스트(Manufacturing Chemist)를 통해 "의사가 혜택을 받는 대가로 의식적으로 처방을 해주는 경우뿐 아니라, 관계가 익숙해지면서 생기는 무의식적인 보답 심리가 문제"라고 밝혔다.
제약사의 정보 제공·판촉 활동과 의료인의 처방 실태를 분석한 체계적 문헌고찰이 코크란 라이브러리에 공개됐다. 연구진은 기존 연구 93건을 분석했다. [사진=코크란 라이브러리 화면 캡처]연구진이 이러한 처방 차이를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제약사 지원금 공개제도의 역할이 컸다. 미국은 제약사와 의료기기 업체가 의료인에게 지급한 금액을 공개하는 오픈페이먼츠(Open Payments) 자료와 메디케어 처방 자료를 결합해, 돈을 받은 의사가 어떤 약을 얼마나 처방했는지 비교하는 연구가 늘었다. 지원 규모와 처방의 변화를 함께 확인할 자료가 쌓인 것이다.
제약 업계의 판촉 활동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연구팀이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미국 제약사들이 의료인을 대상으로 벌인 판촉 활동에 지출한 비용은 203억 달러(한화 약 27조 원)에 달했다. 같은 시기 캐나다에서도 의학 학술지 광고와 병·의원을 방문하는 영업사원 활동에 약 5억 캐나다달러(한화 약 4700억 원)를 지출했다.
호주는 2015~2024년 의사 1만 7519명이 학술대회 참석과 여행 경비, 자문료 등의 명목으로 제약사로부터 총 1억 4870만 호주달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가하면 2020년 세계 10대 제약사 중 7곳은 신약 개발보다 마케팅에 더 많은 돈을 썼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연구진은 "기존 연구의 설계상 판촉 활동이 처방 변화를 직접 일으켰다고 단정하는 데는 제약이 있다"면서도 "선물과 금전을 받은 의사들이 더 부적절한 처방을 하고, 더 많은 약을 처방했다는 결과는 일관됐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제약사의 판촉을 의료인 개인의 판단에 맡겨두기보다 의료기관과 정부가 구체적인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번 연구는 식사나 선물처럼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혜택에서도 처방 차이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이는 제약사와 의사 사이의 금품 제공이 여러 차례 리베이트 사건으로 불거진 한국에서도 눈여겨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