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을 벗지 않은 채 회사를 세우는 의사들. 진료를 병행하며 의료현장에서 확인한 문제의 해법을 직접 제품으로 구현하는 의사 창업가들이 늘어가고 있다. [AI 제작 이미지][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환자를 진료하면서 동시에 회사를 경영하는 의사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들이 개발한 제품의 출발점은 연구실보다 진료현장에서 먼저 발견한 문제였다.
기업이 개발한 기술에 의학적 조언을 보태는 데 그치지 않고, 의료현장에서 확인한 문제를 들고 기획 단계부터 제품 개발에 직접 참여한다. 병원을 떠나 창업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 병원에서 진료와 연구를 이어가면서 회사를 이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지난 3월 펴낸 '의사 창업 현황 분석' 보고서에서 의사 창업이 의료현장의 미충족 수요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기반 창업이라는 특징을 갖는다고 분석했다. 임상 경험에서 기존 치료법이나 의료서비스의 한계를 확인한 의사가 이를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로 풀어내는 방식이다.
이돈행 넥스트바이오메디컬 대표(인하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 김광준 에이아이트릭스 대표(세브란스병원 노년내과 임상부교수), 김성훈 시그널하우스 대표(서울아산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가 이런 유형의 창업가들이다.
이돈행 대표는 내시경 시술에서 반복해 마주한 출혈 치료의 어려움을 의료기기로 옮겼다. 김광준 대표는 의료진이 모든 입원환자의 상태 변화를 계속 살피기 어렵다는 한계를 인공지능(AI)으로 보완하려 했다. 김성훈 대표는 수술실에서 쏟아지는 생체신호를 AI로 분석해 위험 신호를 찾아내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세 사람이 마주한 문제는 달랐지만 출발점은 같았다. 기술을 먼저 만들고 쓸 곳을 찾은 것이 아니라, 진료현장에서 풀어야 할 문제를 먼저 정한 뒤 그 답을 제품으로 구현했다.
잡기 어려운 출혈…'뿌리는 지혈재'에서 답 찾았다
내시경 치료재료 기업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은 '내시경 시술 중 출혈을 더 쉽고 안정적으로 막을 수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위나 장에서 출혈이 발생하면 내시경으로 출혈 지점을 찾아 클립으로 집거나 열을 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지혈한다. 그러나 출혈 위치와 형태에 따라 정확한 지점을 잡기 어렵거나 기존 기구로 접근하기 까다로운 경우가 있다.
이 문제를 오랫동안 진료현장에서 경험한 사람이 이돈행 대표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 대표는 1996년 인하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로 부임해 약 30년 동안 소화기질환 환자를 진료하고 관련 의료기술을 연구했다. 이 대표가 찾은 해법은 출혈 지점을 하나씩 직접 처치하는 대신 출혈 부위를 넓게 덮는 방식이었다.
이를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 2014년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을 설립했고, 대표 제품으로 내시경용 지혈재 '넥스파우더(Nexpowder)'를 개발했다.
넥스파우더는 카테터(catheter)를 통해 출혈 부위에 분말을 뿌리면 수분과 만나 겔 형태의 장벽을 만들어 지혈을 돕는다. 기존 지혈술이 출혈점을 찾아 직접 처치하는 방식이라면 넥스파우더는 분말로 출혈 부위를 덮는 방식으로 접근법을 달리했다.
진료현장에서 찾은 해법은 사업화로도 이어졌다. 넥스파우더는 2022년 9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상부 위장관 출혈에 대한 사용 승인을 받았다. 2024년 11월에는 하부 위장관 내시경 시술 후 지연출혈 예방까지 사용 범위를 넓혔다. 글로벌 의료기기업체 메드트로닉(Medtronic)의 판매망을 통해 미국과 유럽 등 해외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은 2024년 코스닥 시장에 입성했다.
모든 환자 24시간 볼 수 없다는 고민…사전 예측 AI로
환자 악화 예측 AI 기업 에이아이트릭스는 '의료진이 모든 입원환자의 상태 변화를 24시간 계속 살펴볼 수 없다'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병동에는 여러 환자가 동시에 입원해 있지만 의사와 간호사가 모든 환자의 혈압과 맥박, 호흡수, 체온, 검사결과 등의 변화를 같은 수준으로 지속해서 확인하기는 어렵다. 환자의 상태는 그 사이에도 달라지고, 심정지나 중환자실 전실로 이어지는 환자는 급격하게 상태가 악화하기 전부터 여러 생체신호에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김광준 대표는 한 명의 의사가 직접 살필 수 있는 환자와 정보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김 대표는 2003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으로 의사 생활을 시작해 내과 전공의와 내분비내과 전임의 등을 거쳤으며 현재도 세브란스병원 노년내과에서 진료하고 있다.
김 대표는 의료현장에서 축적되는 데이터를 활용해 환자의 위험 신호를 조기에 찾아내고 의료진의 판단과 대응을 지원하는 데 AI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2016년 설립한 에이아이트릭스의 대표 제품 '바이탈케어(AITRICS-VC)'는 입원환자의 여러 의료데이터를 AI로 분석해 심정지나 중환자실 전실 등 상태 악화 위험을 사전에 예측하고 의료진에게 알려준다.
의료진을 대신해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진이 모든 환자를 계속 지켜볼 수 없는 동안 데이터를 분석해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는 환자를 가려내는 방식이다.
바이탈케어는 2022년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 이후 국내 의료기관에 도입됐다. 올해 5월에는 말레이시아 의료기기청(MDA)으로부터 의료기기 허가를 받았다. 말레이시아 허가는 한국과 미국, 베트남, 홍콩, 인도네시아에 이은 여섯 번째 인허가 사례다.
쏟아지는 수술실 생체신호…AI로 위험 신호 가려낸다
생체신호 분석 AI 기업 시그널하우스는 수술실에서 쏟아지는 생체신호 속 위험 신호를 더 빠르게 포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설립됐다.
수술실에서 마취된 환자는 자신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고 의료진에게 말할 수 없다.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는 혈압과 심전도, 산소포화도, 호흡 등 여러 생체신호를 동시에 확인하면서 환자의 상태를 판단한다.
각각의 모니터가 수치를 보여주더라도 여러 신호의 변화를 종합해 임상적 의미를 판단하는 일은 의료진의 몫이다.
김성훈 시그널하우스 대표는 서울아산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로, 2005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수련을 시작한 이후 임상과 연구를 이어왔다. 김 대표는 서울아산병원에서 생체신호와 AI를 접목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환자에게서 발생하는 여러 신호를 AI가 함께 분석하면 의료진의 판단을 보조할 수 있다고 봤다.
병원에서 축적한 연구성과를 실제 제품으로 옮기기 위해 2021년 시그널하우스를 창업했다.
회사는 서울아산병원 임상연구팀에서 개발한 초기 알고리즘을 기술이전 받아 고도화하고 있다. 환자의 심장과 폐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측정하고 AI로 분석해 수술환자의 상태와 위험도를 평가하는 모니터링 의료기기를 개발 중이다.
기존 모니터가 각각의 생체신호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시그널하우스는 여러 신호에서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정보를 찾아 의료진의 판단을 보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식약처 탐색임상시험을 마친 뒤 후속 임상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진료실서 찾은 문제, 다시 의료현장으로
세 기업의 제품은 형태도 기술도 다르다. 한 곳은 내시경 지혈재를 만들고, 한 곳은 병동 환자의 악화를 예측하는 AI를 개발하며, 다른 한 곳은 수술환자의 생체신호를 분석한다.
공통점은 제품 개발의 출발점이다. 내시경으로 잡기 어려운 출혈, 한정된 의료인력이 수많은 입원환자를 동시에 지켜봐야 하는 문제, 수술실에서 쏟아지는 생체신호처럼 의료진이 실제 현장에서 반복해 경험한 어려움에서 시작했다.
사업화 단계는 서로 다르다.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은 FDA 승인을 거쳐 해외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고, 에이아이트릭스는 국내를 포함해 6개 국가·지역에서 바이탈케어의 인허가 기반을 확보했다. 시그널하우스는 탐색임상시험을 마치고 후속 임상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의사 창업이라고 해서 모두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약이나 의료기기, 의료 AI는 개발뿐 아니라 임상시험과 규제, 자금조달, 시장진입이라는 여러 관문을 넘어야 한다. 실제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분석에서도 상당수 의사 창업기업이 연구개발 기간의 자금 부담과 전문인력 확보, 규제 대응 등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의료현장의 미충족 수요를 직접 경험한 의사는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방식의 기술이 실제 진료에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는 강점을 갖는다.
진료실에서 마주한 출혈이 지혈재가 되고, 병동에서 놓치기 쉬운 이상 징후가 위험을 예측하는 AI가 되고, 수술실의 생체신호가 환자의 변화를 읽는 기술로 바뀌는 이유다. 의료기술의 사용자였던 의사들이 동시에 공급자의 역할까지 맡는 1인 2역 시대가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