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I 제미나이 생성 이미지][헬스코리아뉴스 / 이순호] 국내 연구진이 유한양행의 3세대 표적항암제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가 폐암을 넘어 난치성 뇌종양인 교모세포종 치료제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실마리를 찾아냈다. 환자 유래 '교모세포종 오가노이드(GBO)'를 활용해 도출한 연구 결과로, 치료 옵션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교모세포종 분야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충남대학교병원 연구진은 GBO 기반의 약물 감수성 평가(GBO-DST) 플랫폼을 구축하고, 이를 이용해 렉라자의 탁월한 항종양 효과를 입증했다.
교모세포종은 중추신경계에 발생하는 원발성 악성 뇌종양 중 가장 치명적인 질환이다. 수술적 광범위 절제 이후 테모졸로마이드(TMZ)를 이용한 동시항암화학방사선요법이 표준 치료로 쓰이고 있지만, 평균 생존 기간이 15개월 미만에 불과할 정도로 예후가 나쁘다. 특히 테모졸로마이드에 대한 내성이 빈번하게 발생해 재발을 피하기가 쉽지 않은데도, 이를 대체할 마땅한 2차 치료제가 전무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의료 현장에서는 환자마다 다른 테모졸로마이드의 반응성을 예측하기 위해 MGMT 프로모터의 메틸화 상태를 대표적인 바이오마커로 활용해 왔다. 하지만 메틸화가 확인된 환자 중에서도 내성을 보이며 조기 재발하는 경우가 많아 단일 유전자 지표만으로는 정확한 약물 반응 예측에 한계가 컸다.
연구팀은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환자의 살아있는 교모세포종 세포를 아바타처럼 체외에 구현한 GBO 기반 약물 감수성 평가(GBO-DST) 플랫폼을 고안했다. 이 플랫폼은 환자 종양 특유의 유전적, 구조적, 후성유전학적 특징을 원발 종양과 동일하게 유지하면서도 단기간에 복잡한 내성 기전의 약물 반응성을 기능적으로 직접 판별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GBO 아바타가 찾은 대안 '렉라자' … 핵심은 '강력한 BBB 투과능'
연구팀은 이 플랫폼을 활용해 테모졸로마이드 내성을 지닌 교모세포종을 억제할 수 있는 대안 약물을 찾기 위해 스크리닝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미국 FDA 승인을 받은 유망 표적 항암제 중 유한양행의 렉라자가 가장 높은 수준의 항종양 효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 테모졸로마이드 및 로무스틴 등 표준 항암제에 전혀 반응하지 않던 저항성 GBO 모델들조차 렉라자 투여 시 현저히 낮은 농도(IC50)에서 강력한 세포 증식 억제 및 사멸 효과가 나타났다.
렉라자가 이처럼 악명 높은 교모세포종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 핵심 비결은 바로 우수한 혈액뇌장벽(BBB) 투과 능력에 있다.
교모세포종 환자의 절반 이상은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유전자 변이나 과발현을 동반한다. 과거 1세대 및 2세대 EGFR 표적항암제들은 약물이 뇌혈관을 둘러싼 BBB를 통과하지 못해 교모세포종 임상시험에서 뇌실질 내 유효 농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이와 달리, 3세대 비가역적 EGFR 억제제로 개발된 렉라자는 태생부터 뇌 투과율을 극대화하도록 분자 구조가 설계돼 폐암의 뇌전이 병변에 탁월한 효과를 이미 입증한 바 있다. 이 강력한 BBB 투과능이 교모세포종의 척박한 미세환경을 뚫고 들어가 암세포 성장의 핵심 엔진인 EGFR 증식 신호를 차단한 것이다.
동물 모델서도 종양 억제 입증 … 뇌종양 표적항암제 패러다임 전환 기대
연구팀은 체외 오가노이드 실험의 성과를 생체 내(in vivo) 환경에서 교차 검증하기 위해 테모졸로마이드 저항성 GBO(GBO-023)를 뇌에 이식한 면역결핍 마우스를 이용한 동물 실험을 추가로 진행했다.
실험 결과, 렉라자를 투여한 마우스 그룹은 인체 유래 종양 세포의 증식 지표를 정량화하는 Ki-67 및 HuNu 단백질 발현 분석에서 현저한 하향 조절 효과를 나타냈으며, 장기간 투약에도 체중 감소 등 뚜렷한 독성 반응이 관찰되지 않아 우수한 내약성까지 확인했다.
이는 렉라자의 효능이 실제 종양의 미세환경과 유사한 두개골 내부에서도 강력한 치료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를 확증하기 위한 전향적 다기관 임상 연구도 이미 본궤도에 올랐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충남대병원은 계명대 동산의료원, 순천향대병원, 동아대병원, 영남대병원 등과 함께 150명의 교모세포종 환자를 대상으로 GBO의 예후적 가치를 평가하고, GBO 플랫폼을 이용해 렉라자를 비롯한 다양한 항암제의 잠재적 적용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관찰 연구를 진행 중이다. 지난 2021년 시작한 이 연구는 오는 2028년 말 종료하는 것이 목표다.
이 연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경우, 진단 직후 오가노이드를 배양해 환자의 약물 반응을 신속하게 확인하고 렉라자 등 최적의 약물을 즉각 처방하는 뇌종양 치료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미충족 의료 수요가 극도로 높은 난치성 교모세포종 시장에서 렉라자가 성공적으로 적응증 확대를 이뤄낸다면, 이는 단일 품목의 매출 성장을 넘어 국산 신약의 글로벌 상업화 가치를 한 차원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연구에서 확인된 것처럼 렉라자가 폐암 신약을 넘어 뇌종양 표적항암제로서 새로운 글로벌 스탠다드로 도약할 수 있을지 업계의 이목이 쏠린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셀 리포트 메디신(Cell Reports Medicine)'에 최근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