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폐기 위기에 처했던 비운의 약물 '비마그루맙(Bimagrumab)'이 GLP-1 비만치료제와의 병용요법을 통해 그 가치를 증명하며,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주목 받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제미나이 생성 이미지)[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비마그루맙(Bimagrumab)'. 이름조차 생소한 이 약물이 비만 치료제 시장의 새로운 '게임 체인저'로 떠오르고 있다. 세상에 나온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단 한 번도 상품명을 갖지 못했던 약물이 최근 전 세계 제약·바이오 업계의 시선을 끌어모으고 있다. 예상치 못한 후발 임상 결과가 지난 3월 2일(현지 시간),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 '네이처 메디신(Nature Medicine)'에 소개되면서다.
네이처 메디신 실린 'BELIEVE' 임상 2상 ... 위고비 병용시 근육 93% 보존
'비만 치료를 위한 비마그루맙 및 세마글루타이드 단독 또는 병용 요법: 2상 무작위 임상 시험'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논문에는 비만 성인 50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BELIEVE' 임상 2상 결과가 실렸다.
시험 결과, 노보 노디스크(Novo Nordisk)의 '위고비(Wegovy, 성분명: 세마글루타이드·Semaglutide)'와 '비마그루맙'을 72주간 병용 투여했을 때 체중이 평균 22.1%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중요한 것은 빠진 체중의 92.8%가 순수 지방이었으며, 대조군인 위고비 단독 투여군에서 약 7.4%의 근육 손실이 나타난 것과 달리 비마그루맙 병용군은 근육량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해 냈다. 이는 GLP-1 계열 약물의 고질적 약점으로 꼽혀온 '근육 손실' 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극복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바티스 '실패작'의 반전... '신의 한 수' 된 약물 재발견
당초 스위스계 글로벌 제약사 '노바티스(Novartis)'가 개발하다 버린 이 약물이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된 데는 10년 전 한 신생 바이오 벤처의 남다른 안목이 결정적이었다.
2000년대 초 노바티스는 이 약물을 희귀 근육병인 '산발성 봉입체근염(sIBM)' 치료제로 개발하며 큰 기대를 걸었다. 근육 성장을 억제하는 수용체인 'ActRII'를 차단해 근육량을 강제로 늘리는 획기적인 기전 덕분이었다. 특히 이 약물(코드명 'BYM338')은 2013년 FDA에서 혁신 치료제와 희귀의약품 지정까지 받으며 수조 원대 블록버스터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2016년 결정적인 임상(2b/3상)에서 근육량 증가 대비 실질적인 신체 기능 개선을 입증하지 못하면서 FDA의 승인에 실패했고 결국 폐기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노바티스는 이후 근감소증이나 고관절 골절 회복 등 적응증 변경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글로벌기업조차 손을 떼려던 '실패한 자산'을 눈여겨본 곳이 미국의 신생 바이오 기업 베르사니스 바이오(Versanis Bio)였다. 베르사니스는 '비마그루맙'이 가진 '근육 보존'이라는 본질적 가치가 비만 치료 시장의 고질적 난제인 근손실을 해결할 열쇠가 될 것임을 간파하고, 2021년 노바티스로부터 7000만 달러(한화 약 1055억 원)이라는 싼 값에 '비마그루맙'을 손에 넣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제약업계 역사에 남을 '신의 한 수'가 됐다.
당시는 위고비 등 GLP-1 계열 약물들이 빠른 체중 감소 과정에서 근육까지 함께 녹인다는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부각되던 시기였다. 베르사니스는 '비마그루맙'을 단독 치료제가 아닌, GLP-1의 근손실 문제를 보완하는 '애드온(Add-on)' 약물로 재정의했고 이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릴리, 2조 8000억 들여 베르사니스 인수... '비마그루맙'의 화려한 귀환
베르사니스의 이러한 도박은 적중했다. '비마그루맙'의 잠재력을 확인한 글로벌 빅파마 일라이 릴리(Eli Lilly and Company)는 2023년, 베르사니스를 최대 19억 2500만 달러(약 2조 9000억 원)에 인수하며 이 약물을 자사 파이프라인에 전격 편입시켰다. 노바티스 시절 코드명 'BYM338'로 불리던 비운의 약물이 릴리의 'LY3985863'이라는 새 이름을 얻으며 화려하게 부활한 순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비마그루맙'의 과거 병용 임상 약물이 현재 일라이 릴리의 경쟁사인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해당 임상이 설계될 당시 '비마그루맙'의 권리가 베르사니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사니스는 당시 시장 점유율 1위였던 '세마글루타이드'를 표준 치료제로 삼아 '비마그루맙'의 근육 보존 효능을 입증하는 전략을 택했고, 이 결과가 역설적으로 일라이 릴리가 거액을 들여 베르사니스를 인수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얼마나' 보다 '무엇을' 남기나... 비만 치료, 신체 리모델링 시대로
일라이 릴리는 현재 자사 주력 제품인 '젭바운드(Zepbound, 성분명: 티르제파타이드·Tirzepatide)'와 '비마그루맙'의 병용 임상 2상을 별도로 진행 중이며, 그 결과는 올해 안에 공개될 예정이다. 만약 이 임상마저 성공한다면 '비마그루맙'은 GLP-1 계열 약물의 치명적 약점을 보완하는 필수적인 '패치 파일'이자, 일라이 릴리가 비만 치료제 시장의 주도권을 굳히는 핵심 병기가 될 전망이다.
현재 비만 치료제 시장의 승부처는 '얼마나 많이 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느냐'로 이동하고 있다. 단순히 체중계 숫자를 줄이는 양적 감량의 시대가 저물고, 근육은 지키면서 지방만 선택적으로 걷어내는 '체성분 최적화(Body Recomposition)'가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비마그루맙은 신약 개발에서 적응증 재정의(Drug Repositioning)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며, '노바티스가 포기했던 비운의 약물이 10년 만의 부활을 통해 비만 치료의 패러다임을 바꿀 진정한 게임 체인저가 될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