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식품의약국(FDA) 전경[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기자]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수십 년간 항암 보조제로 쓰여온 '루코보린(Leucovorin calcium, 상품명: 웰코보린·Wellcovorin)'을 희귀 유전질환인 '뇌엽산 결핍증(Cerebral Folate Deficiency, CFD)' 치료제로 전격 승인했다. 다만 이번 승인은 뇌엽산 결핍증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FOLR1 유전자' 변이로 인해 엽산 운반 기능이 선천적으로 차단되는 특정 유형(CFD-FOLR1)에 한정된다. 이번 승인으로 '루코보린'은 해당 유형 뇌엽산 결핍증에 대한 최초의 FDA 승인 약물이 됐으며, 소아와 성인 환자 모두에게 사용할 수 있다.
'루코보린'은 GSK가 '웰코보린'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다 1997년 생산을 중단한 약물이다. 현재 미국 시장에는 오리지널 제품 없이 제네릭(복제약)만 유통되고 있다. FDA가 이번에 생산 중단된 '웰코보린'의 라벨(사용설명서 및 적응증)을 업데이트한 이유는 제네릭 의약품이 오리지널과 동일한 라벨을 유지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이를 통해 시중의 모든 '루코보린' 복제약에도 새 적응증이 자동 적용되도록 조치했다.
◆ 치료 불가능했던 신경계 희귀질환… '루코보린'이 첫 공식 치료제로
CFD는 뇌에 필수 영양소인 엽산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발생하는 신경계 질환이다.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중 이번에 승인된 'CFD-FOLR1' 유형은 전체 인구 100만 명 중 1명 미만에 해당하는 초희귀 유전질환이다. 환자들은 중증 발달 지연, 운동장애, 간질 발작 등 심각한 신경학적 합병증을 겪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 질환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와 유사한 증상을 동반하는 경우가 있어 정확한 감별이 중요하다.
'루코보린'(엽산 유사체)은 1983년부터 항암 치료 시 부작용 완화제 등으로 광범위하게 쓰여왔다. 이번 승인 이전까지 이 질환에는 정식으로 허가된 치료제가 없었기 때문에, 의사들은 다른 목적으로 승인된 '루코보린'을 허가 범위 밖에서 처방하는 이른바 '허가 외 사용(오프라벨, off-label)' 방식에 의존해 왔다. 이번 승인은 그러한 관행에 공식적인 근거를 부여한 것이기도 하다.
◆ 자폐증 치료제로 대대적 홍보했지만… FDA "데이터 불충분"
이번 승인은 지난해 9월 트럼프 대통령과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부 장관이 '루코보린'을 "많은 자폐 아동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치료제"라고 백악관에서 공개 홍보한 지 약 5개월 만에 이뤄졌다. 당시 FDA는 제약사들에 '루코보린' 생산을 대폭 늘릴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FDA는 (당초 기대를 모았던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 전반에 대한 적응증은 제외해 향후 논란과 과제를 동시에 남겼다.) FDA 관계자는 "처음에는 넓은 범위의 자폐증 치료제로 검토를 시작했지만, 과학적 데이터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근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좁은 범위(CFD-FOLR1)로 적응증을 축소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자폐증 전반에 대한 효능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데이터가 없다"고 밝히면서도, 관련 임상 연구에 대해서는 열린 입장을 유지했다.
◆ 무작위 임상시험 없이 46명 증례 분석으로 승인
주목할 점은 이번 승인이 전통적인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RCT), 즉 신약 허가의 표준적 절차인 엄격한 비교 임상시험 없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FDA는 2009년부터 2024년까지 발표된 문헌을 체계적으로 검토해 '루코보린'으로 치료받은 CFD-FOLR1 환자 46명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결과 경구 '루코보린'만 투여받은 27명 중 24명(89%)에서 발작 감소, 운동 기능·의사소통·행동 개선 등 임상적으로 유의미한 신경학적 호전이 확인됐으며, 치료 시작 연령은 생후 약 2개월에서 33세까지 다양했다. FDA는 환자 수가 워낙 적은 초희귀질환의 특성상 대규모 임상시험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이 같은 실사례 중심의 검토 결과를 승인 근거로 인정했다.
◆ GSK, 생산 재개 계획 없어… 제네릭 의약품에 적응증 자동 반영
이번 적응증 확대는 FDA가 '웰코보린'의 신약신청(NDA, New Drug Application) 보유사인 GSK와 협력해 라벨 업데이트를 진행하며 성사됐다. NDA란 제조사가 신약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해 최종 판매 허가를 받는 절차를 의미한다.
지난 1997년 '웰코보린' 생산을 중단한 GSK는 이번 승인 이후에도 제품 재생산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규정상 제네릭(복제약) 의약품은 오리지널 의약품(NDA 제품)과 동일한 라벨을 유지해야 한다. 이에 따라 이번에 승인된 신규 적응증은 현재 유통 중인 모든 제네릭 '루코보린'에도 자동 적용된다.
◆ "지금까지 승인된 치료제 없었던 질환"… 마카리 FDA 국장, 특별히 의미 부여
마티 마카리(Marty Makary) FDA 국장은 "오늘 승인은 FOLR1 변이로 인한 뇌엽산 운반 결핍증 환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이정표"라면서 "지금까지 FDA 승인 치료 옵션이 전혀 없었던 질환"이라고 강조했다.
FDA 의약품평가연구센터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트레이시 베스 호에그(Tracy Beth Hoeg) 박사는 "이번 승인은 초희귀질환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제를 신속히 발굴하겠다는 FDA의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실제 임상 데이터가 자연 경과 대비 명확한 임상적 혜택을 입증할 경우 승인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