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리아뉴스(헬코미디어)[헬스코리아뉴스] 사후 처방 중심의 전통적인 보건 의료 체계가 한계에 직면했다. 질병이 명확한 증상으로 발현된 이후에 치료를 시작하는 방식으로는 국민의 건강권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천문학적으로 치솟는 사회적 의료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렵다. 이제는 '아프기 전에 찾아내고, 첫 발병 시 재발을 뿌리 뽑는' 선제적·예방적 의료 시스템으로 국가 보건 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다.
본지가 보도한 인제대 상계백병원 등 다기관 공동 연구팀의 급성췌장염 추적 관찰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급성췌장염을 한 번 앓은 환자가 재발할 경우, 장기가 비가역적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만성췌장염으로 진행될 위험이 무려 70배로 치솟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췌장염의 만성화는 소화 장애와 영양 흡수 불량은 물론, 췌장암의 주요 위험 인자인 당뇨병으로 이어지는 파멸적인 경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비극을 초래하는 핵심 위험인자가 음주와 흡연 등 개인의 생활 습관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급성췌장염이 단순히 '한 번 치료하면 끝나는 일회성 질환'이 아니라, 첫 발병 순간부터 국가와 의료계가 개입해 철저한 사후 관리와 생활 습관 교정을 유도해야 하는 '만성 관리형 질환'임을 시사한다. 치료 현장에서의 복약 안내뿐 아니라, 퇴원 후 환자의 일상을 모니터링하고 재발을 막는 제도적 체계가 시급하다.
질환의 선제적 방역 필요성은 세계보건기구(WHO)가 결핵 퇴치의 핵심 변수로 지목한 '무증상 결핵' 분야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결핵 발생률 상위권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뚜렷한 증상이 없어 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동체로 전파되는 무증상 결핵은 방역망의 가장 취약한 고리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민진수 교수팀이 질병관리청과 손잡고 대규모 '무증상 결핵 국가 코호트' 구축에 나선 것은 국가 보건 정책 역사에서 매우 고무적인 진전이다. "아프지 않을 때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환자와 공동체 모두에게 이롭다"는 의학적 타당성이 마침내 국가 차원의 표준 가이드라인과 과학적 정책 근거로 구체화될 발판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잠복에서 무증상, 활동성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정밀 분석해 조기에 차단하는 시스템이 안착된다면 결핵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씻는 결정적 변곡점이 될 것이다.
질병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적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는 것이다. 췌장염의 재발을 막는 사후 관리 인프라와 무증상 결핵을 조기에 솎아내는 전향적 선별 검사 체계는 환자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중증 질환으로 유입되는 환자를 원천 차단해 건보 재정의 건전성에도 기여할 것이다.
보건당국이 이번 연구의 가치를 인정하고 대규모 정책연구용역을 맡긴 것은 매우 명민한 조치로 평가할 만하다. 당국은 이번 과제를 통해 도출될 학계의 정밀한 R&D 성과들이 상아탑의 연구에 머무르지 않도록, 실제 현장에 적용 가능한 '한국형 무증상 결핵 관리 가이드라인'과 췌장염 재발 방지 대책으로 신속히 구체화해야 한다.
국민이 증상을 느끼고 병원 문을 두드리기 전에 국가가 시스템으로 먼저 선별하고 관리하는 '선제적 의료 안전망'의 완성이야말로 대한민국 보건 의학이 나아가야 할 궁극적인 지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