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필 기자[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매출 730억 엔(약 6800억 원). 전년 대비 18.1% 증가한 어느 일본 CDMO(위탁개발생산) 기업의 지난해 성적표다. 덴마크 힐레뢰드 공장 증설과 미국 홀리스프링스 신공장 가동을 양축으로, 80억 달러(약 11조 6000억 원) 규모의 라이프사이언스 투자도 본격화했다. 스위스의 론자(Lonza), 우리나라의 삼성바이오로직스와 함께 글로벌 CDMO 사업을 선도하는 곳 중 하나다.
이 기업의 이름은 FDB. 낯설게 들리겠지만, 그 뿌리는 중년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디지털카메라 이전 시대, 한 번쯤 손에 쥐어봤던 필름 기업 후지필름(FUJIFILM)이다. 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후지필름 다이오신스 바이오테크놀로지(FUJIFILM Diosynth Biotechnologies)'. 2003년 이곳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코모리 시게타카(Komori Shigetaka)는 취임 직후 "필름 사업은 끝난다"고 선언했다. 당시 필름은 이 회사 전체 매출의 60%, 이익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1만 명을 감축하고 3500억 엔(약 3조 3000억 원)의 구조조정 비용을 감수하면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우리가 가진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필름 제조의 정밀 화학 제어는 바이오 공정 관리로, '불량 제로' 철학은 세포 배양 공정의 신뢰도로 이어졌다. 디지털 전환에 소극적 태도를 취하며, "가진 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만 묻다 2012년 파산한 필름 시대 라이벌 코닥(Kodak)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한국 바이오 산업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질문이다. 후지필름의 성공은 설비 투자나 인수합병(M&A) 규모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기술의 본질을 꿰뚫고 그것을 새로운 산업에 이식한 데서 나왔다. 글로벌 CDMO 경쟁의 축도 이미 같은 방향으로 이동했다. 동일한 설비 규모에서도 수율(yield), 배치 성공률, 공정 재현성에 따라 수익성이 극단적으로 갈린다. 글로벌 빅파마들이 CDMO 파트너를 선택할 때 단순 생산능력(capacity)보다 '첫 배치(batch) 성공 확률'과 '상업화 전환 속도'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이유다. 공정 실패로 인한 생산 지연은 비용 문제가 아니라 신약 출시 일정 자체를 흔드는 리스크가 됐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이미 바이오 CDMO 성공 방정식을 반도체 파운드리 모델에서 찾는다. 설계(신약 개발)와 제조(위탁생산)의 분업 구조, 공정 기술의 플랫폼화, 수율 관리의 정밀도가 두 산업에서 판박이처럼 겹친다는 것이다. 반도체 공정에서 수십 년간 단련된 나노 단위 변수 제어, 수율 극대화를 위한 실시간 데이터 분석, 석유화학의 연속 공정 운영 노하우는 바이오리액터 배양 환경 제어와 연속 생산 시스템 안정화에 곧바로 적용 가능한 역량이라는 분석이다. 아직 그 연결고리가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낡은 필름 한 롤이 수조 원 규모의 바이오 생산시설로 재탄생했다. 후지필름은 세상이 사양산업이라 부르던 필름의 유산을 냉정하게 해부했고, 그 안에서 바이오라는 새로운 전장을 열 무기를 찾아냈다. 질문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져 있다. 반도체, 석유화학, 정밀기계 등, 대한민국 제조업이 수십 년간 체화한 이 역량들을 우리는 얼마나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가. 그 안에 바이오 공정의 정밀도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바이오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확실히 자리 잡게 하는 기술적 씨앗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 K-바이오의 진짜 무기는 이미 우리 손에 쥐여 있는지도 모른다.